이 책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관한 쟁점들에 대하여 완전하게 해석한 책이다. 한·중·일 삼국의 석학들이 130년 동안이나 풀지 못하고 논쟁을 벌여 오고 있는 난해한 문제들을 완전하게 해석하여 이에 “비문의 논쟁에 대한 종결을 선언하는” 소중한 책이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비가 414년에 세워지고 비석이 서 있는 국내성의 주변에 청나라에서 200년 동안이나 봉금제도를 시행하여 오다가 1877년에 해제가 됨에 따라 태왕의 비의 존재 사실이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비문의 발견 사실을 우리보다도 일본의 첩자들이 먼저 탐지하고 연구에 착수하여 비문이 일본에게 유리하도록 변조개삭을 하고 90여 자나 되는 많은 글자를 변조하여 시중에는 만신창이가 된 비문이 50여 종류나 횡행하고 있어 한·중·일 삼국의 석학들이 130년 동안이나 논쟁을 벌여 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80이 넘은 2018년에야 이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고 문제점들을 살펴보니 그에 대한 해답이 훤히 다 내다보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점들을 모두 다 밝혀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 글을 쓰기로 결심을 굳히고 이에 그 난제들을 모두 다 완전하게 해석하며 “비문의 논쟁에 대한 종결을 선언”할 수 있게 된 사실을 알리는 귀중한 책을 펴게 되었다.
自 序
광개토왕비문 논쟁에 대한 종결선언문
제1장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의 진실
1. 비의 건립과 재발견
1) 광개토왕능의 설치와 비의 건립
2) 만주 지역의 봉금제 실시
3) 봉금해제와 회인현懷仁縣의 설치
4)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재발견 경위
5)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의 소재지
6)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명칭
7) 비의 형태
제2장 초기의 탁본
1. 제1차 탁본拓本
1) 관월산關月山의 동정
2) 관월산關月山의 수탁수자手拓數字와 전체 탁본
[표 1] 현의 설치 이전에 발견했다는 자료
[표 2] 비의 재발견에 대한 자료
(1) 이초경李超瓊의 발문
(2) 이초경李超瓊의 요좌일기遼左日記
2. 제2차 탁본拓本(『회여록』에 수록된 비문)
1) 성경장군 좌씨설(천진탁공 4인설)
2) 진사운陳士芸의 탁본설
3) 오대징吳大徵의 『황화기정皇華紀程』
4) 영희榮禧의 탁본설
3. 제3차 탁본拓本
1) 반조음潘祖蔭本 광서 11년(1885년)
(1) 섭창치葉昌熾의 발어跋語
(2) 장연후張延厚의 발어跋語 1885년
4. 제4차 탁본拓本(1889년, 盛昱본 劉承幹 崔右年의 跋)
1) 유승간劉承幹의 발문跋文: 『海東金石苑補遺』 1922年
2) 최우년崔右年의 발문跋文
3) 오중희吳重熹의 『고구려호태왕비석문 찬고후발』
5. 탁본의 유형별 탁본 시기
1) 초기의 탁본에 대하여
6. 탁본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경위
1) 비문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알려지는 과정
2) 계연수桂延壽의 탁본
3) 『황성신문』의 기사(「遊帝室博物館 관람기」)
4) 1905년 10월 31일 자 『황성신문』의 기사
5) 광개토왕비문이 최초로 수록된 문헌
제3장 광개토왕비문에 대하여
1. 비문의 실체
1) 비의 실체에 대하여
2) 비문의 문체 구분
2. 광개토대왕비의 원문廣開土王碑의 原文
1) 비의 원문
2) 고문으로 작성된 부분
3) 今文으로 작성된 부분
4) 파손된 글자가 많아 기타로 처리
5) 今文으로 작성된 부분
6) 고문으로 작성된 부분
7) 今文으로 작성된 부분
[표 3] 비문의 행별 자구수 및 오기 파손된 글자
[표 4] 今文의 字句 통계표
3. 비문의 번역에 대하여
1) 번역에 대하여
[표 5] 書頭 20자에 대한 번역문
4. 광개토왕비문 역주문
1) 제1면의 번역문
2) 제2면의 번역문
3) 제3면의 번역문
4) 제4면의 번역문
5. 결자에 대한 필자의 復元
1) 결자 복원에 대한 서론
2) 來渡海破[來☐☐☐] 百殘[☐☐]의 공란에 대한 필자의 복원
3) 필자가 교정 복원한 문자와 번역문
[표 6-1] 필자가 복원한 글자 (고딕체)
[표 6-2] 필자가 복원한 글자 (고딕체)
6. 비문의 난해한 글자
1) 변조된 난해 문자
2) 廣開土王 諡號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