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필집의 기저에는 한곳에 머무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깔려 있다. 작가는 마치 행려자처럼 길 위에서 떠돈다. 늘 어딘가를 향해 걷고, 어떤 대상과 마주한다. 이때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대상의 표면만이 아니다. 작가는 대상의 빛에 겹쳐 있는 어둠을 동시에 들여다본다. 이 순간은 빛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고, 삶과 죽음, 부재와 현존이 교차하는 시간. 작가는 이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다른 시간 속으로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작가를 비끄러맨 현실은 그것을 온전히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는 되돌아오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가고 싶은 세상과 갈 수 없는 세상, 이쪽과 저쪽, 나와 타자, 그 사이로 오고 감, 마주침의 관계는 박정숙 수필의 동력이다.
김순아 시인·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내게는 분신 같은 글들을 이렇게 떠나보낸다.
문단과 문단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분다.
수필이 태양을 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책머리 중에서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아직 어둡다. 춥다. 모든 게 부서진 폐허만 같다. 그러나 작가는 믿는다. 죽음이 나뒹구는 전장에도 꽃이 피듯이, 이 폐허 어딘가에 너, 당신, 그대가 있으리라고. 그 너-당신-그대로 인해 내 삶이 온통 흔들리고, 그렇게 흔들려서 내 삶이 변할 것이라고. 그래서 고백한다. 너-당신-그대라는 그 머나먼 이름을 향해, 그 모든 첫 만남을 위해, 처음처럼, 두 번째 수필집을 엮는다. 다시 쓴다. 나의 마음이 너, 당신, 그대라는 이름에 닿을 때까지. 너라는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의 지리학 안에서.
김순아 시인·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제1부
칠레의 밤
혼자가 되다
또 다른 용돈
금요일 오후 두 시
동백꽃 어머니
숲애서
이팝나무꽃
가야진사
국화 한 송이
제2부
천원(天願)
생명의 천체도
이로운 물의 섬
천계로 가는 계단
해무
여수 밤바다
바다로 간 고래
허공을 움켜쥐다
켈리그라피
제3부
가을에 쓰는 진술서
회화나무
각시원추리꽃
바위 얼굴
난청
리모델링
세컨드 하우스
자리
10분의 자유
제4부
바람을 부르다
가을의 여백
석등
조선통신사의 길을 걷다
봉발탑
기억의 저장소
임경대에서
쌈지공원
모랫등
해설 - 모든 ‘첫’을 향한 하얀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