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태평무는 ‘나라의 독립과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춤’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와 같은 말이 막연한 수사(修辭)에 그치고 있는 것 같아 태평무를 창안한 한성준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해서 태평무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는지를 깊이 연구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상권을 통해 조선의 전통예술이 시련의 역사 속에서도 그 시대의 부침을 겪으며 변모되어 가는 양상을 지켜보면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을 마주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1910년대에 기생조합이 공연단체로 변모해 가는 과정, 그리고 1920년대에는 서양 무도의 유입과 최승희로 대변되는 신무용의 대두로 우리 전통춤이 빈사 상태가 되어 가는 연예 환경의 변화를 다룬 상권은 하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우미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는 2019년 11월에 국가무형유산 태평무(한영숙류) 보유자로 인정받은 인간문화재이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조선 춤>의 존재조차 인식하기 어려울 때 비천한 신분제도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60 평생을 춤과 장단에 몸을 바치며 우리 전통예술을 지켜 간 전설적인 인물 한성준의 삶을 따라가며 그 시대의 전통예술의 변모양상을 고찰한 것이 상권의 내용이다.
하권에서는 저자가 명고수로 살아오던 한성준이 새삼 무용가의 길을 걷기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고,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염원하는 2인무 형태의 <태평무>를 창안하게 된 연유를 추론·설명한다. 그리고 한성준의 2인무 태평무에서 ‘왕의 역’을 맡아 춤춘 한영숙(한성준의 손녀)이 해방 후 정립한 홀춤(한영숙류 태평무)에 푸살 장단이 어째서 들어 있는지, 그 특별한 의미에 대해 태평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제1편 서설(序說)
1. 춤의 명칭으로 본 ‘태평무(太平舞)’
2. 이른바 재인청(才人廳) 계열의 태평무에 대한 이해
― 태평무의 유래(由來)에 관한 논의와 관련하여
3. ‘고수50년 한성준 씨(鼓手五十年 韓成俊氏)’
― 1937년 3월 27일 자 조선일보의 Box기사
4. 무동(舞童)놀이와 연희장(演戲場)의 등장
제2편 대한제국의 최초인 실내 극장의 등장과 전통공연예술(傳統公演藝術)의 변모 양상
1. 대한제국에서 최초로 설치된 실내 극장, 희대(戲臺)
― 고종 등극(登極)40년 칭경(稱慶)행사時 수용(需用)次
2. 협률사(協律司)의 등장, 그리고 협률사(協律社)의 출현
3. 협률사(協律社)가 출현한 시기와 그 성격
4. 협률社의 시발점(始發點)은 민유회(民遊會) ?
5. 협률社의 1903년 흥행에서 드러난 실상(實相)
― 협률社는 무엇을 목표로 설립한 걸까?
6. 협률社가 1906년에 갱설(更設)된 배경
7. 갱설(更設)된 협률社(제2기)의 흥행 모습과 그에 대한 사회적 반응
8. 협률社(제2기)의 혁파(革罷) 논란의 추이(推移)
9. 협률社(제2기)가 폐지된 후, 사설(私設)극장의 출현
10. 한성준이 서울에 올라와 생활하기 시작한 시기
― 한성준이 서울에 올라온 계기는 뭘까?
11. 황실극장 원각사(圓覺社)가 개장(開場)된 경위
그림 : 관기들의 자선연주회(1907년 12월) 공연 목록 광고
12. 신연극(新演劇)을 내걸은 원각사(圓覺社)의 실상
13. 원각사(圓覺社)에서의 전통연희 양식(樣式)의 변화
제3편 우리의 전통공연예술이 1910년대에 전개되어 간 양상
1. 한일병합(韓日倂合)이 되기도 전에 관기(官妓)들에게 밀어닥친 변화
그림 : 1908년 9월의 <기생단속령> 조문
2. 한성기생조합소(漢城妓生組合所)의 출범(1909년)
3. 한일병합을 전후(前後)로 한 창부들의 활동 양상
― 연극장으로서의 원각사가 사설극장에 미친 영향
4. 한일병합 직후의 연예계(演藝界) 상황은 어떠했나?
5. 단성사에서 ‘강선루(降仙樓) 일행’이 공연한 의의
그림 : 1912년 5월의 단성사 강선루(降仙樓) ‘연예안내’ 광고
6. 단성사에서 ‘강선루(降仙樓) 일행’이 보여 준 공연의 내용과 그 의미
도표 : 단성사 강선루의 공연 종목 및 공연 날짜
7. 공연단체로 변모해 가는 기생조합(妓生組合)
― 광교조합, 다동조합, 시곡기생조합의 결성(1913년)
8. 1915년의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와 여흥(餘興)단체
9.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의 등장(1915년)
10. 경성구파배우조합의 활동과 강경수(姜敬秀)의 역할
11. 한남권번(漢南券番)에 모습을 드러낸 한성준
12. 공진회의 전후(前後)로 본 기생조합 간의 경쟁 양상
― 예능인(藝能人)에서 화류계(花柳界)의 여인으로
도표 : 1915년의 물산공진회에서 기생조합들이 공연한 종목
제4편 1920년대의 조선에 일어난 연예 환경의 변화
― 이른바 ‘조선춤’이 빈사 상태가 되어 가는 과정
1. 1920년대에 각 권번(券番)들이 취한 자구책(自救策)
― 4권번/5권번의 연합연주회, 권번의 온습회(溫習會)
2. 서양의 공연예술인 무도(舞蹈)의 유입과 그것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波長)
3. 실종된 강경수의 역할을 이어받은 한성준(韓成俊)
4. 1926년의 석정막(石井漠)의 무용시(舞踊詩) 공연
5. 조선 명창대회(名唱大會)의 성행과 그 의미
6. 신무용가의 길을 밟고 있는 최승희(崔承喜)의 근황
(상 권) 【지식창고】
1) 재인(才人), 그리고 재인청(才人廳)의 성격
2) 재인청 계열의 태평무가 생성된 배경은 뭘까?
3) 갑오개혁(甲午改革)
4)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탄생
5) 구한말(舊韓末), 왕실 음악을 관장하던 기관의 명칭
6) 조선시대의 여자 예인(藝人)을 지칭하는 호칭
7) 협률司가 교습하려 한 새로운 음률(音律)
8) 명창 (名唱) 이동백과 고수(鼓手) 한성준의 만남 그리고 강경수(姜敬秀)에 대한 이야기
9) 전통연희 예인(藝人)들에게 원각사 시절이 남다른 이유
10) 구한말(舊韓末)의 관기와 기부(妓夫)의 관계
11) 시곡(詩谷)기생/시곡예기(詩谷藝妓)의 실체
12) 시곡(詩谷)기생의 활약상(活躍相)
13) 기생의 위상(位相)이 저하(低下)된 배경
14) 경성구파배우조합의 활동이 정지된 배경
15) 기생의 춤보다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된 배경
16) 石井漠으로부터 독립한 최승희의 행보(行步) ― 무용연구소 개설(1929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