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태평무는 ‘나라의 독립과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춤’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와 같은 말이 막연한 수사(修辭)에 그치고 있는 것 같아 태평무를 창안한 한성준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해서 태평무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는지를 깊이 연구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상권은 하권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우미 역할이라면, 하권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알리고 싶은 핵심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한성준이 명창들의 매니저 겸 음반 프로듀서로 동경에 갔다가 최승희에게 ‘조선춤’을 가르쳐 주게 된 경위, 조선성악원이 창설된 지 3주도 지나지 않아 와해된 배경, 한성준이 1936년에 발표한 『왕의 춤』과 1938년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공연한 『태평무』가 무엇이 다른지 등을 설명하였고, 그리고 2인무 형태의 한성준제 태평무가 해방 후에 홀춤으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면까지 추론을 통해 밝혀냄으로써 한영숙류 태평무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전승가치가 있는지를 명확히 규명하였다.
저자는 2019년 11월에 국가무형유산 태평무(한영숙류) 보유자로 인정받은 인간문화재이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조선 춤>의 존재조차 인식하기 어려울 때 비천한 신분제도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60 평생을 춤과 장단에 몸을 바치며 우리 전통예술을 지켜 간 전설적인 인물 한성준의 삶을 따라가며 그 시대의 전통예술의 변모양상을 고찰한 것이 상권의 내용이다.
하권에서는 저자가 명고수로 살아오던 한성준이 새삼 무용가의 길을 걷기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고,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염원하는 2인무 형태의 <태평무>를 창안하게 된 연유를 추론·설명한다. 그리고 한성준의 2인무 태평무에서 ‘왕의 역’을 맡아 춤춘 한영숙(한성준의 손녀)이 해방 후 정립한 홀춤(한영숙류 태평무)에 푸살 장단이 어째서 들어 있는지, 그 특별한 의미에 대해 태평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제5편 명고수(名鼓手)이던 한성준(韓成俊)이 어떠한 연유로 무용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1. 1930년을 맞이한 무용계의 움직임
― 최승희의 창작무용 제1회 공연회(1930년 2월)
2. 1930년을 맞이한 조선악(朝鮮樂) 관계자들의 움직임
― 조선음률협회의 창립(1930년 9월)
3. 조선음률협회가 시도한 정화(淨化)공연회의 한계
― 조선일보가 주최한 팔도명창대회(八道名唱大會)와 비교해서
4. 조선음률협회의 새로운 시도(試圖)
― 여류명창공연회(女流名唱公演會)
5. 여류명창대회의 각광(脚光) 및 그로 인한 조선음률협회의 균열(龜裂)
6. ‘창극조(唱劇調)’라는 용어가 등장한 의미
7. 최승희의 조선에서의 무용공연에 대한 결산 (上)
― 조선에서 신무용가로 자리 잡은 최승희
8. 최승희의 조선에서의 무용공연에 대한 결산 (下)
― 조선에서 활동하던 신무용가 최승희의 고민과 한계
9. 최승희가 동경에서 한성준을 만났던 이유와 그 의미
10. 조선음률협회의 해체와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의 창설
도표 : <조선성악원→ 조선음악연구회→ 조선성악연구회> 변천 과정
11. 조선성악원이 3주도 지나지 않아 와해(瓦解)된 배경
― 조선음악연구회(조선성악연구회의 前身)의 발기·창립 과정
제6편 한성준(韓成俊)의 무용활동의 전개와 결실
1. 한성준에 의한 조선무용연구소의 개설
2. 한영숙이 한성준의 춤 제자로 입문하게 되는 경위
3. ‘한성준의 첫 무용발표회가 1935년에 부민관에서 열렸다’는 지금까지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
4. 한성준의 첫 무용발표회에 대한 단상(斷想)
― 작품은 거의 무용극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5. 한성준의 첫 무용발표회가 실패로 끝난 후의 변화
― 조선음악무용연구회(朝鮮音樂舞踊硏究會)의 창립
6. 1938년의 고전무용대회에서 등장한 ‘태평무’는 1936년에 발표한 「왕의춤」을 명칭만 바꾼 것일까?
그림 : 고전무용대회의 조선음악무용공연회 종목과 출연자
7. 고전무용대회 이후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활동
― 서선순업(西鮮巡業), 남선순업(南鮮巡業)
8.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1940년에 펼쳤던 공연들
9. 한성준에게 1941년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10. 1942년 이후에 보이는 한영숙의 공연 활동의 성격
제7편 한영숙의 태평무에는 푸살장단이 왜 들어 있는 걸까?
― 한성준制 태평무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고찰
1. 한성준은 『태평무』의 모태(母胎)가 『왕의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2. 한성준이 ― 『왕의춤』에 만족하지 못하고 ― 태평무를 새롭게 창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3. 한성준制 태평무는 『왕의춤』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 ‘장단도 차자내엇고’라는 한성준의 말에 함축된 의미
4. 강선영의 태평무에서 사용하는 장단 편제(編制)
― 한성준制 2인무 태평무를 그려 보기 위한 검토자료(A)
5. 한영숙의 태평무에서 사용하는 장단 편제(編制)
― 한성준制 2인무 태평무를 그려 보기 위한 검토자료(B)
도표 : 한영숙 태평무의 장단 편제를 분석한 논문 내용
6. 한영숙의 태평무에는 푸살장단이 왜 들어 있는 걸까?
7. 언제 한영숙의 태평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8. 한영숙류 태평무의 특징과 전승가치
9. 결어(結語)
(하 권) 【지식창고】
17) 조선에서 신무용가로 활동하던 최승희의 한계
― 일본에 다시 가기로 결심한 이유
18) 한성준의 춤에 대한 역량은 널리 알려졌다
19) 한성준의 춤 제자로 강선영이 입문하게 되는 경위
― 학춤에 관한 강선영의 추억
20)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고전무용대회가 개최된 과정
21)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會)가 인기를 끌었던 배경
22) 한영숙의 눈으로 본 일본 및 만주(滿洲)에서의 공연
― ‘고희(古稀)기념집’에 실려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23) 한성준의 작고(作故)가 한영숙에게 의미하는 것
24) 한성준의 태평무에 관해 언급되는 무속무용 유래설의 주의사항
25) 한성준이 1938년에 완성한 태평무는 100여(餘) 종의 다른 창작 춤과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일까?
26) 2인무 형태의 태평무 모습을 그려 보기 위한 출발점
― 태평무에 관한 강선영 선생의 어록(語錄)
27) 한성준이 태평무 의상(衣裳)을 수의(壽衣)로 입었다는 의미에 대해
28) 2인무 형태의 태평무에 담겨 있는 한성준의 생각
29) 무형유산 보호 제도의 변천사
― 무용 종목에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