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심장!
꿀렁꿀렁 가슴을 흔들어대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저 심장!
총체적으로 보자면 이 단편들에서는 진정 리얼리티가 구제되고 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저급한 믿음의 거부로부터, 시종일관 폭력과 위반을 통해 리얼리티 혹은 실재가 완전히 낯설게 제시되는 것. 「살인자의 입」에서 「거대한 바퀴」에 이르는 동안 한국 문학이 전혀 엿보지 못했던 새로운 예술적 지평이 열리고 또한 성취된다. 이 책은 일종의 폭력적 기록인데, 그 폭력은 서사 자체에도, 서사적 현실에도, 서사의 외부에도, 나아가 문학 일반에도 두루 가해지고 있다. 이 폭력들이 한국 문학의 유일한 활기이자 예술과 삶의 강렬한 도약임을 애써 믿고 싶지 않은 자들에게는 일독을 권하지 않는다.
회화에 관해 보자르에서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거나 알 바 아니라는 듯, 오늘날 문단의 요구와 표준은 명징하고 명료해 보인다. 예컨대 문예의 창작을 대학교에서 돈 주고 배워 이제 겨우 중학생 수준의 문장력은 면한 위인들을 잘도 골라내는 놀랍고도 거대한 재생산의 드라마야 제법 구경하는 재미씩은 난다. 그렇게 작가랍시고 문단에 나온 자들이 남다른 대중성을 과시하며 쌓은 경력이, 보다 덜 뛰어난 젊은이들의 모범이 되고 전범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또 대학교를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이 통속의 카르텔은 진정 웃음을 유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대중과의 결탁, 무능과 무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작가들이 얻어낸 것은 유명세, 우상의 신화, 사이비 지성인을 위해 비워 둔 의자들 말고도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줄 만하다. 참아주기 힘든 것은 그들의 문학 자체와 그 수준이며 이것이 오로지 문단의 배타적인 표준으로 등록되어 있는 저열한 현실이다. 난폭함과 부조리를 제시하며 미래에서 너무 빨리 현재에 당도한 서사, 대중의 눈을 대수롭지 않게 묵살하고 마치 고흐의 별처럼 빛나는 괴물의 눈을 부릅뜬 소설은 한 줄도 알아보지 못하는 작자들의 표준이 문제다.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아 돌아와 글을 내놓아도 비표준이므로 등단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저 의기양양한 문단 표준이 문제다. 자 이제, 그렇다면 어떠한가? 여기, 『익살스러운 심장』을 쓴 작가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과연 어떠한가?
“물론입니다! 위대한 문학의 언어들은 나에게 이미지의 끝없는 원천이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문학의 언어는 모두가 모순적이고 암시적인 개념을 지닌 단어들의 연쇄가 아닙니까? 그것들을 분석하고 분해하는 일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 과정에서 자발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으로 생겨나는 이미지들의 흐름을 따라가는 작업을 매 순간 즐깁니다. 언어와 이미지는 실재 자체보다 더 강력하고 강렬하게 실재를 환기시키지요. 문제가 되는 것, 그리고 사물의 본질에 근접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왜곡이에요. 위대한 문학과 예술은 삶과 현존을 증대시키는데, 그것은 시종일관 활기찬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삶과 현존을 야생의 그것으로 다시 제시하며 그렇게 합니다.”
(「영웅의 생애」 중 일부)
빅토리아 폭포가 떠올랐다. 허리를 숙인 채 쏟아져 내리는 폭포에 아버지가 머리를 감고 있었다. 폭포수가 수돗물이 됐든 아버지가 거인이 됐든, 내가 말한 것이 이런 것이다. 이러면 상황이 골치 아프고 복잡해진다. 지목하는 손가락이 폭포를 끌어다 놓는 방식, 빅토리아보다 더 거세고 난폭하게 시간을 쏟아내는 이 개입, 이 난입은 내게서 모든 선택과 처신의 기회를 앗아간다. 머리를 감길 수도, 안 감길 수도 없는 난처한 국면. 이쪽에도, 그리고 저쪽에도 빅토리아가 쏟아지는 난맥상. 이쪽에서는 아버지가 머리를 감고 있고, 저쪽에서는 아버지와 나의 시간이 폭포만큼 무겁다.
(「분출하는 물」 중 일부)
우주의 모든 원리 가운데 예외 없이 참이라고 알려진 것은 생명이 유일한데, 아, 유일한 저 생명은 진정 참인데, 유일하게 알려진 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명백하게 그것은 있지만, 오직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종교와 종교학도 생명에 관해 쥐고 있는 앎은 없다. 그저 두려움을 이기려는 방편으로 죽음 이후나 삶에 빗대어 설계해놓았을 따름이다. 죽은 자들의 공동체가 어디 외딴곳에 따로 있다는 발상은 적어도 저 생명에 대한 앎과 두려움 이전의 것임을 알기에, 딱하다. 눈앞의 진실을 묵인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삶이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것을 더욱 섬뜩한 실재로 적시한다. 알려지지 않은 것, 말해지지 않는 것에 관해 알리고자,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이 의과학에서 종교학에 이르는 범주에 포섭도 포획도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익살스러운 심장」 중 일부)
누운 채 뼈의 형상이 된 아버지는 사실 뼈의 형상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인간의 형상 혹은 형태란 뼈가 이루어내는 것이다. 불의 도움으로 죽음이 드디어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형상이다. 저 뼈는 내내 아버지를 아버지로 살게 한, 말 그대로 삶의 골격이다. 저것은 이미 있었던 형상이며, 남는 것은 최후에도 삶의 형식이다. 결국 그것이라면, 뼈로서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었노라고 죽음이 제시하는, 죽어서야 까발려졌지만 언제나 이러했노라고 우리 앞에 나타난 저 골격에다, 삶의 비의는 도대체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뼈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거대한 바퀴」 중 일부)
살인자의 입
고백
극장
봄의 열기
영웅의 생애
분출하는 물
익살스러운 심장
거대한 바퀴
발문-오토바이 | 김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