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변산에서 내달아 온
죽비의 서늘함
긴 뚝방길 한달음에 내달리나니
폭 익은 두 눈 부릅뜬
가슴 없거들랑
세 치 혀 말뽄새 꿰매어 두어라
비득치에 가면
- <비득치에 가면> 中
김교서 시인은, 문단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원석’이다. 등단 40년이 다 돼서 이제야 첫 시집을 내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낡은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시대는 너무 빨리 변하고 그의 걸음은 너무 느렸던 탓일까? 시를 발표하는 것도 뜸하고, 시인들의 자리에도 그는 잘 끼지 못하였다. 그러니 시대와 쉽게 동화하지 못한 그의 시는 아주 고전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석’에 가깝다. 그러나 그와 함께 얼굴을 내민 시인들의 면모와 오래된 시인들의 기억 한편에는 아슴프레 새겨 있으리라. 이미 명망을 얻은 고재종 시인과 김해화 시인 등이 그가 시단에 얼굴을 내밀던 시대의 동기생들이었으니.
그는 부안 바닷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도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독서회 활동을 하며 젊은 꿈을 키웠다. 그러나 만만한 세상은 아니었을 터. 한때 그는 <품바> 공연단의 일원으로 전국을 떠돌기도 했다. 그 실력은 가끔 술이 거나해지면 슬슬 구슬려 듣고 보는 ‘일품’ 안주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선 모두 한 덩어리로 들썩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배운 것 없이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은 언제나 뜨내기 장사꾼 아니면 막노동 판이었다. 힘든 노동과 굶주림 속에서 그 시절을 보낸 것이 원인일까 모르겠으나 그의 몸은 아직도 왜소하다. ‘천 근’이나 ‘만 근’쯤 되는 삶의 짐을 지고 살아왔으니 오죽할까. 하여튼 그에게도 독재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 오는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은 비껴갈 수가 없었으니, 자연스레 눈을 뜬 그의 의식은 시(詩)로 동(動)하였다.
시집의 표제작인 「비득치에 가면」이 실린, 1984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14인 신인 작품집 『시여 무기여』에는 고재종, 권만기, 김갑수, 김명환, 김석현, 김종우, 김해화, 박광배, 박광수, 신연주, 엄귀섭, 서소로, 이석영 외에 김교서 시인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허나 애석하게도 오랫동안 그는 시단의 말석에서조차 사라진 채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며 이를 갈았다.
그러다 보니 그가 부르는 노래는 어딘지 푸석하기도 하고 개펄 같기도 하다. 오래 막노동을 하다 보니, 온몸에 묻은 시멘트 가루처럼 푸석거리는 노래에 고향으로 향하는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 금세 ‘진흙창’ 개펄이 되어 펼쳐진다. 그가 조개를 잡던 그 개펄은 지금 새만금 방조제로 막혀 황폐한 채 버려져 있다. 새 시대는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을 덮어 버렸으나 척박하지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그의 몸만이 ‘증거물’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먼 놈의 잠이 이렇게/ 안 온다냐/ 온 삭신은 쑤시고 저리는디/ 여그 저그 빛 갚으라/ 쫄리게 하는 사람은 줄 섰는디/ 들어올 돈 구녁은 뺀허고/ 워째 살아야 한다냐/ 징그럽게 일을 혀도/ 이눔의 살림/ 깨진 독 물 붓기여/ 천불 나는 가슴의 피/ 죽으믄 나슬랑가/ 근디 징그런 놈의 잠/ 워째 이리 안 온다야/ 내일 일 맞춰 놨는디/ 안 죽고 살라믄 하루라도/ 더 혀야는디/ 가신 엄니/ 해설핀 신작로가 아스라이/ 허리 휜 몸으로 걸어오신다/ 허튼 안개 내리는 밤” - 「내력」 전문
환갑을 넘기고 칠순을 바라보는 그의 내력 한 조각은 이러하다. 힘든 육신을 끌고 살아가지만 결코 이 정부를 인정할 수 없는 그 시절을 거닐며 그는 무정부주의자의 꿈을 꾸면서 “울화통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차올라/ 너희가 희희낙락 사람들 가슴에/ 거품 들게 허는 꼬락서니/ 눈 뜨고는 못 보는 것인 게(「겨울이 봄에게」)”, ‘숨 거둔 물줄기 살아서 오’는 청보리가 되기도 한다.
“빙하기 들어선 모지리/ 넌더리 들판/ 사람의 숲 걸어 나오면/ 죽은 도시의 회색빛 창/ 바람의 넋을 안고/ 검붉은 피를 토한다/ 발가벗기운/ 노동의 호흡 하나/ 온몸으로 진저리친다/ 폭 익은 마음밭 열면/ 버려진 목숨들 바삭거림/ 가슴으로 찾아든다/ 응달의 고요를 버무려/ 티끌도 없는 허공/ 쓰라린 깃발의 아름다움 하나 없는/ 치명의 봄꽃/ 화엄의 강으로/ 붙들어 둔다” - 「무정부주의자의 꿈」전문
지난 시절, 효순이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치인 참사와 광우병 소 수입 반대, 4대강 사업 반대,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 등 전 정부의 비민주적인 정책과 미군의 악행에 대항하는 시위와 집회에 거리낌 없이 한 촉의 촛불이 되어 걸걸한 목청을 터뜨리던 그날, 분노와 한탄을 쏟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날. 어찌 보면 그가 원하는 것은 오래전 ‘비득치’처럼 모든 생명이 살아 숨 쉬고 대동세상을 이루는, 한없이 갸륵하고 소박한 꿈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은 몸피는 이제 여리여리하다. 다만 정신과 목소리만 살아 소리칠 뿐이다. 아직도 잃지 않은 고향 말로 걸쭉한 노래 한자락 깔 뿐이다.
등단 후 첫 시집이 된 이번 시집은, 그래서 시의 연대도 들쭉날쭉하다. 시도 좀 촌스럽고 구닥다리스럽다. 그러나 하나만은 올곧다. 그의 올곧음은 시인의 정신과 등뼈를 훤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푸석거리는 시어 사이에 드러나 있다. 이 시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솔직히’, 그렇게 솔직하게 부안 촌사람이 서울에서 어떻게 망가진 삶을 거치면서 살아남았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 주변에서 본 김교서 시인
1984년이었다. 겁나게 추운 겨울이었다. 서울이었다.
시를 무기로 세상과 맞서기로 한 14인의 시인들이 춥고 캄캄한 12월 서울 밤거리에 나타났다. 14인의 무사도 아니고 14인의 총잡이도 아니고 14인의 신인들이었다. 김교서 시인은 그때 그 실천문학의 시집 제1권 『시여 무기여』를 통해 세상에 나온 14인 중 한 명이다. 그 겨울 뿔뿔이 흩어져서 4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러니까 이 시집이 김교서 시인이 햇수로 39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시를 보니 김교서 시인도 나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형 고마워요.
- 김해화(시인, 통일문학연대)
김교서 시인의 시(詩)는 머리와 기교와 얄팍한 손끝으로 쓴 시와 단연 차별된다. 그는 가냘픈 육신과 살과 뼛가루와 ‘녹슨 비명’을 압축, 추출하여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의 엄숙함, 생존의 진정성을 보여 주고 있다.
“가난의 들판에서 태어나/ 혀가 빠지도록/ 낮은 곳 진흙창 가시밭길” 속에서 헤매어 본 자의 아우성이 시집 전편에 녹아 있고, “누군가를 위하여/ 처절하게/ 스스로 끓는 물 되어 본 적 있는” 자의 외침을 뛰어넘어, “허기진 창시 움켜쥐고 되돌아”가는 뼈저린 삶이 천지간에 진동하고 있다.
아, 그런데도 김교서 시인은 “덜 여문 눈썹달/ 배시시 웃는” 걸 바라볼 줄 안다. 이 시집은 진정한 의미의 ‘민중시의 출현’이며, ‘늙은 노동자의 노래’가 우리네 가슴을 서럽게 격동(激動)시킨다. 아, 김교서 형님이여!
- 이승철(시인, 한국문학사 연구가)
망연자실(茫然自失), 갯바위에서 하염없이 밀물을 기다리는 따개비 신세인가. 엄니와 누이동생이 생각나는 비득치, 그 뻘밭이거나 도시의 진흙창, 어디에도 없던 노동자 시인의 자존(自存), 아니 한 인간의 존재. 고향은 고약한 인간들 야망의 흙더미에 덮이고, 천근만근 등을 짓누르기만 하던 노동판에도 기댈 곳은 없었다. 이제 그는 노동의 현장에서 밀려나 아프게 건너온 그곳을 뒤돌아본다.이 시집은 편향된 사회에 대한 그의 편향된 분노이자, 음습하게 가려진 그곳을 되비추는 거울이다.
- 김이하(시인)
햇살 뜨거운 여름에도, 눈보라 치는 한겨울에도,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서 박근혜 탄핵까지……. 노동을 마친 축 늘어진 몸뚱이를 끌고, 작업복 그대로 늘 광장에 촛불을 들고 서 있던 시집 없던 시인 교서 형. 이젠 ‘시집 있는 시인’이 된다고……. 멋쩍은 표정으로 눈도 못 마주치고 고마워했던 교서 형……. 좋겠수! 이젠 ‘시집 있는 시인’ 형님.
- 이오하(제보자X)
김교서 형님의 천근만근 간난한 평생이 드디어 시집으로 묶였다.
여느 노동자의 쉽지 않은 삶이 그렇듯이 한 구절 한 구절이 팍팍한 삶 속에서 살아내기 위해 용을 쓰며 힘겹게 버텨온 김교서 시인의 발자국은 단순한 시집이 아닌 한 늙은 노동자의 일생을 그린 자서전이 아닐까 싶다.
김교서 형님의 첫 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육윤수(촛불 집회에서 술벗이 된 아우)
제1부 늙은 노동자의 노래
몸
늙은 노동자의 노래
밥·1
멸치, 날개를 달다
누이동생
눈썹달
계단을 타다
계단을 오르며
강남 신세계백화점에서
이태원에서
강남을 누비다
하루
달력에 동그라미가 없다
이천칠년 섣달 열아흐렛날
소지의 넋
가을볕
몸살
바닷가 야생화
세한도
꽃샘추위 가는 길
눈 오는 밤
제2부 부치지 못하는 편지
비득치에 가면
소풍
조개잡이
세밑 겨울
부치지 못하는 편지
어머니, 그리고 들꽃
사랑은
벌초
내력
숯
꽃자리·1
낮달
서정이 꽃피는 나무
꽃섬 가는 길
쪼잔한 詩
시인의 집
집
사랑의 힘
비 오는 밤의 독서
반골의 서(書)
제3부 촛불, 그 이름으로
대화
가락동 도축장에서
빈 수레
명동성당 가는 길
강정 토방에서 밥을 먹다
산본역에서
촛불, 그 이름으로
단풍 꽃
여린 꽃에게
대금산조
겨울 달
유채꽃
낙엽의 무덤
春雪
지하철역의 詩
냉이꽃
으아리꽃
찔레꽃
별
낮술
직관
제4부 목숨
목숨
노동의 이름으로
기륭 노동자를 생각하며
구로동 114번 종점을 지나며
주름의 결기
가리봉 오거리에서
장마와 겨울 작업복
노동 일기
꽃 한 송이
한파주의보
흰말채나무꽃
고마리꽃
구럼비에 가면
돌멩이 하나
투계(鬪鷄)
김개남
청보리
소박한 꿈
잎싹에게 -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겨울이 봄에게
무정부주의자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