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선생님은 학교 도서관을 맡겼다.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책 속에 파묻혀 있다가 세상으로 나왔지만 어느 순간 책과 멀어졌다. 마음은 항상 책을 요구했지만 몸에는 굳이 책이 소용되지 않았다. 책과 멀어지면서 자신과도 멀어졌다.
일은 몸을 짓눌렀고 마음속 도서관도 피폐해졌다. 아프고 힘들었다.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어느 날 입고 싶은 옷 한 벌이 생겼다. 마음속 도서관을 다시 열었다. 사소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들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하면서 작게나마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가족, 친구, 이웃들의 이야기이자 주목받지 못하는 일상의 기록이다. 시골을 떠나 도시의 어느 골목길에 스며들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벗들을 소환하는 글이다. 뒤란 돌아 옆집 대밭에 후드득 빗방울 돋는 날 문득 한 해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 펼쳐 보고 싶은 책이다.
도서관이 여러 곳에 만들어지고 책이 넘쳐 난다고 지식이 많아지고 사유가 깊어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은 아닐까.
인간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는 것은 지혜와 감성이다. 이런 지혜와 감성을 바탕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고뇌를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 수필이다.
저자는 항공기를 개발하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아침에 눈만 뜨면 하늘부터 쳐다보는 삶을 살았다.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매일매일 날씨가 좋기를 기도했다.
항공기 개발이 성공하려면 계획된 시험비행을 안전하게 마무리하여야 했고 무사히 비행을 마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날씨가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상과 동시에 마음을 졸이며 하늘을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직업전선을 떠나면서 더 이상 하늘을 쳐다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가끔 하늘을 보면서 산다. 하늘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다. 해와 달과 별, 바람과 구름, 비와 눈이 있다. 무엇보다도 무지개가 걸리는 하늘에서 삶의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도시는 병들고 아프다. 오월의 밤하늘은 원래 한여름 밤의 빛나는 은하수를 준비하느라 맑아지고 높아지는 법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대기 오염과 미세먼지들로 해서 하늘은 뿌옇고 탁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길을 걸어도 신록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량감을 느낄 수가 없다. 이런 날은 고향 근처 푸른 산자락의 맑은 아침 바람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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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과 애태움을 통해 만들어진 그리움은 만남과 동시에 그리워한 만큼의 행복감을 남기지만 한편으로 그리움 이상의 아픔과 슬픔을 안기고 사라진다.
그쯤에서야 그리움은 과거의 기억에 의한 미래의 바람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현재의 행복이란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벚꽃이 피면서 건조한 도시의 풍경이 마치 만춘(晩春)의 고향 산야처럼 풍성하면서도 화려하게 변신하더니 벚꽃이 지면서 다시 황막(荒漠)하고 쓸쓸함으로 돌아섰다.
순식간에 사라진 벚꽃 자리는 이미 피고 졌어야 할 목련에 명자나무며 때늦은 개나리가 메꾼다.
예년 같으면 먼저 피었을 꽃들이 순서를 바꾸어 뒤늦게 피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봄이 곁에 남아 있는 듯해서 기특하기까지 하다.
벚꽃의 화려한 만개를 기다렸던 그 그리움이 너무도 빨리 없어지는 것은 기약 없이 또 내년 봄을 기다려야 하는 애태움이자 아픔이기 때문이다.
- 「벚꽃 이별」 중에서
특별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생명을 이어 가는 화분을 보며 여러 생각이 일어난다. 사람이 자연을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것은 언제쯤부터일까.
자연과 유리(遊離)되어 인공만의 세상에 사는 삶이 만들어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화시기를 지나 오직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밀폐된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로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숨 쉬고 관계하며 일상을 이어 간다. 하지만 때로는 마음 그 자체는 사면팔방이 견고한 콘크리트 벽체에 갇혀 자연과 온전히 단절된 세상을 사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 「제라늄 화분 옮기기」 중에서
겨울이 깊어지면서 고향의 숲은 적막하다.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고 더 이상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숲은 여전히 햇살과 달빛을 붙들며 많은 생명을 키워 낸다. 나무뿌리 아래는 매미 유충이 땅을 뚫고 나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수액을 빨고 이름 모를 풀벌레 알들은 옹이구멍을 집 삼아 추위를 피하고 있을 것이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강건해진 작은 가지들은 빛나는 봄을 꿈꾸며 지금도 마른 떨켜에 쉼 없이 생명수를 나르고 있으리니.
- 「잊지 못할 고향 숲의 풍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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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것은 익숙하나 고루(孤陋)하고 새로운 것은 신선(新鮮)하나 두렵다. 어우러짐과 홀로 있음의 균형이 세상에 요구되는 인성과 품성을 만들어 낸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통제하는 것은 고루와 신선이 단지 시간의 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이후에야 시간이 고루를 밀어 내고 고독도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고독은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기대고 건네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나 성장에는 어울림보다 혼자인 시간, 깊은 사유가 훨씬 더 필요하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만들어진 감성은 외향적 감각으로 깊이가 없고 지식의 바다를 헤엄치며 만들어진 감성은 지혜가 덧들어 내면적 감각으로 삶의 순리를 깨닫게 한다.
고뇌와 성찰을 통해 나온 저자의 글들은 서정과 서사가 어우러진 한국 수필문학의 전형이다.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창의적 상상이 읽는 재미를 주어야 한다.
도심의 어느 골목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읽었으면 하는 에세이집이다.
서문
Ⅰ 봄
1. 달력 유감
2. 세월의 강을 따라 소환되는 단상(斷想)들
3. 고향의 움쑥 한 봉지
4. 남녘에서 온 김치
5. 달래 예찬
6. 꽃대궐
7. 봄 손님과 주인
8. 매실차
9. 벚꽃 이별
10. 고추 모종 심기
Ⅱ 여름
11. 함박꽃
12. 우물이 사라졌다
13. 라면을 끓이며
14. 제라늄 화분 옮기기
15. 공짜 복숭아 한 상자
16. 호박잎쌈
17. 배롱나무꽃 추억
18. 밭은 죄가 없다
19. 얼떨결에 산 빵
20. 골목길
Ⅲ 가을
21. 누나가 보낸 고구마
22. 꿈꾸는 농막
23. 붕어빵과 호박식혜
24. 부전 시장에서 온 뜻밖의 선물
25. 선풍기 재포장
26. 까치밥
27. 전원 고향악(故鄕樂)
28. 연(鳶)
29. 신기료장수
Ⅳ 겨울
30. 활수와 판수
31. 인공지능(AI)이 가지고 올 섬뜩한 미래
32. 작은누나
33. 5촉 전구
34. 다시 시작되는 삶
35. 고무신
36. 석양을 등지고 앉은 친구
37. 큰누나
38. 멈추어 선 시계
Ⅴ 다시 봄
39. 마당이 있는 풍경
40. 내 마음속 도서관
41. 벽장 안 책들
42. 헛간
43. 빈집 유감
44. 할머니의 마당질
45. 남녘 바닷가에서 만난 삶들
46. 숲이 있는 풍경